골프용품의 역사
초창기 골프 장비는 막대기와 조약돌 이었다. 클럽에 관련한 본격적인 첫 기록은 1502년에 등장한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가 퍼스에 있는 활 제조업자에게 14실링을 내고 클럽제작을 의뢰했다는 내용이다. 제임스 4세는 골프 금지령을 폐지한 그 해에 클럽을 만들게 하면서 자기 돈도 아닌 국고를 썼다.
이로부터 10년 후인 1603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을 겸한 제임스 6세는 윌리엄 메인을 왕실클럽 제조업자로 지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메인은 영국에서 독점적인 클럽 제조업자가 되었다. 1554년 골프에 관련한 기록을 보면 에든버러에 있는 볼 제조업자는 신발제조업자 였다. 이 무렵에는 볼이 동물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골프채는 로열 트룬 클럽에서 보유하고 있는 이른바 ‘ 트룬 클럽 ‘이다.
스코틀랜드의 한 선박에서 발견된 것으로 1741년에 발간된 신문도 함께 있었다. 최소 18세기 중반의 것이라는 증거다.
트룬 클럽의 헤드는 길고 납작하다 1880년대까지 쓰이던 롱노즈 클럽이다. 헤드 밑창엔 남, 리딩 에지에는 동물의 뿔을 붙여 내구성을 높였다. 샤프트와 헤드의 연결부위는 요철식으로 만들어 끼운 후 동물의 힘줄로 만든 접착제로 붙이고 촘촘하게 묶었다.
당시 골프공은 나무를 깎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보은 점차 페더리로 바뀌었다. 새의 깃털로 만든다고 해서 페더리라고 불렀다.
젖은 거위 털등을 동물의 가죽에 채워놓은 것이다. 깃털로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부드러운 것은 아니었다. 마르면 부풀기 때문에 딱딱하면서도 탄성이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이 공에 맞으면 사망할 정도로 단단했고, 거리도 꽤 나갔다.
페더리는 완벽한 구형이 될 때까지 가죽속에 조심스럽게 털을 우겨 넣어야 했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 않았다. 한 사람이 하루에 4-6개를 만드느게 고작 이었다.
페더리의 가격은 현재 화폐 단위로 하면 한 개에 10만원이 넘었다. 비싼데다 오래 사용할 수 없었고 물에 젖으면 다시 쓰기 어려웠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페더리를 쓰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페더리를 쓰는 진짜 골프는 귀족들만의 것이었다. 17세기 때의 페더리 볼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고, 경매에 나오면 억대의 가격에 팔린다.
1848년 새로운 골프공이 나왔다. 에든버러에 살던 골프광이자 목사인 제임스 패터슨은 아시아에서 보낸 선물 포장 속에서 이상한 물질을 발견했다.
물건이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함께 넣어둔 고무였다. 고무는 끓는 물에 넣으면 부드러워져 구형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만든 거타퍼차는 오래 쓸 수 있다. 그래서 흥미로운 현상이 목격 되었다. 공에 흠집이 생긴 오래된 거타퍼차가 새 공보다 더 멀리, 더 똑바로 날아간다는 사실이었다.
과학자들이 그 이유를 설몀할 수 있게된 것은 50년 후의 일이다. 그러나 제조업자들은 이 불가사의한 현상을 이용해 발전된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날카로운 펀치가 달린 손망치로 새 공에 의도적으로 흠집을 냈다. 이 공은 모양은 투박했지만 볼이 멀리 그리고 똑바로 날아가게 도와주는 현대의 딤플과 비슷한 원리였다.
가터퍼차가 사용된 기간은 50년 정도 되고, 이 공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페더리 시절 귀족들의 전유물 이었던 골프를 다시 대중화 시켰다.
나무로 된 티페그는 1922년에 대중화 되었다. 이전까지 흙을 긁어모아 그 위에 공을 올려놓고 썼다.
흔히 티잉 그라운드를 일컫는 티박스는 티로 쓰기 위한 흙을 담아두는 상자라는 뜻이다.
드라이버를 포함한 우드의 헤드는 1978년까지 진짜 나무였다. 1979년 클럽 제작사 테일러메이드는 금속 헤드를 발명했다.
내구성이 강하고 속을 비워 크기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드라이버의 혁명적 발전을 가능케 했다.
현재 우드의 헤드는 나무를 쓰지 않고 금속을 쓴다. 그러나 우드는 아직도 메탈이 아니라 우드로 부르는 것이 대세다
유리를 뜻하는 안경은 요즌 대부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지지만 플라스틱이라고 하지 않고 유리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해외스포츠중계